신들과 함께: 고대 근동의 눈으로 구약의 하나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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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환 지음 도서출판 학영 2023. 12관련링크
책소개
유일신 사상에 익숙한 우리는 고대의 다신관(多神觀)을 미개하게 생각한다. 한 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쪼개어 여러 신들에게 할당했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신관이 다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변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은 신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예컨대, 우리 조상들만 해도 신들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 그들은 하늘의 옥황상제, 바다의 용왕, 저승의 염라대왕을 믿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겼다. 아기를 점지해 준다는 삼신 할머니, 천둥을 주관한다는 벼락 장군, 집을 관리한다는 대신 할머니, 문자를 주관한다는 글문신장도 우리 조상들의 삶을 가득 채운 신들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위에 언급한 신들을 허구의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인간의 생사화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실존자들로 믿었다. p 40 (제1장 신들의 세상)
아론은 다소 황당한 답변을 제시한다. 황금 송아지가 불에서 저절로 나왔다는 게 아닌가? 현대인의 눈에 비친 아론의 변명은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 마치 신상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처럼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주석가들은 아론의 대답을 “궁색한 변명” 혹은 “어처구니없는 변명”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게 반응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아론의 답변이 신상을 만드는 문맥에 들어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고대 근동 사람들은 입 씻기-입 열기 의식을 통해 신상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의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부분은 신상 만들기 작업에 인간이 개입했다는 부분을 철저히 부인함으로써 신상의 신성을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지식은 아론이 출애굽기 본문에서 의례사제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독법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아론의 답변을 신상 만들기 의식의 한 요소-인위적인 흔적을 지우는 요소-로 볼 수 있게 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의례사제 아론이 내놓은 답변은 “궁색한 변명”이나 “어처구니없는 변명”이 아니라 입 씻기-입 열기 의식에 기대고 있는 ‘종교적인 답변’이다. p 73 (제1장 신들의 세상)
사무엘상 6장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신관이 가정되어 있다. ‘본국의 신들이 막을 수 없는 재앙-우연히 발생한 재앙-이 있을 수 있다’라는 개념이다. 사무엘상 본문의 이방 사제들과 점쟁이들은 블레셋 지방에 일어난 재앙을 해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두 개로 제시했다. 하나는 적국의 신-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일으켰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어쩌다가 당한 재앙”(삼상 6:9)이었을 가능성이다. 여기에 “그저 어쩌다가 당한”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미크레는 ‘우연’ 이나 ‘운명’을 의미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블레셋 이방인들은 적국의 신과 상관없이 미크레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재앙이 존재하고, 그 재앙은 본국의 신들도 막을 수 없다고 믿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독특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바로 우주에는 신들조차 온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영역-미크레에 의해 구동되는 초월적인 영역-이 있다는 개념이다. p 131-132 (제2장 이방인들의 세상)
우선 계명이 주어졌던 시점을 출애굽기 문맥 속에서 고려해 보자. 야훼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집트의 모든 신들보다 당신이 강하다는 점을 계시하심으로 이집트의 신들이 예배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신들을 버리고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야훼께서 정복하셨던 신들은 이집트의 신들이었지 다른 지역의 신들-광야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거주하는 신들-은 아니었다. 히브리 민족은 야훼께서 이집트 외부에 있는 신들보다 강한지 혹은 약한지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께서는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는 계명을 이집트 땅을 벗어난 모압 땅에서 주셨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이 제1계명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야훼께서 이집트에서 보여주신 능력이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다신론의 개념-특히 신이 특정 영토와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에 깊게 노출되어 있던 고대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다. p 153-154 (제3장 언약 백성의 세상)
야훼의 치료를 경험한 나아만은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행동-아람의 국가신인 림몬에게 허리를 굽히는 행동-에 대해서 몹시 불편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림몬은 “천둥을 치는 자”(Ramman)라는 뜻으로 풍우의 신 바알의 요란한 속성을 강조하는 호칭으로 보인다. 야훼 하나님의 치료를 경험한 나아만이 아람의 국가신 림몬(바알)에게 절하는 행위를 더 이상 옳지 않게 판단했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은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아만이 야훼를 단지 이스라엘의 치료의 신으로 이해했다면 굳이 아람의 국가신을 배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신론자였던 나아만은 림몬을 국가신으로, 야훼를 치료신으로 섬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야훼의 치료를 경험한 나아만은 야훼와 림몬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이해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p 200 (제3장 언약 백성의 세상)
우리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풍요의 신으로 섬기지는 않지만, 풍요를 가능케 하는 돈을 신처럼 섬기기도 한다. 우리는 세크메트, 닌티, 에쉬문을 치료의 신으로 섬기지는 않지만, 치료를 가능케 하는 의학을 신처럼 섬기기도 한다. 우리는 토트, 에아, 나부를 지식의 신으로 섬기지는 않지만, 지식을 가능케 하는 학문을 신처럼 섬기기도 한다. 이처럼 고대의 신들은 새로운 시대의 옷을 입고 다른 이름으로 환생했다. 전쟁의 신들은 군사력으로, 성의 신들은 외모지상주의로, 재물의 신들은 물질만능주의로 환생해 현대인들의 시선을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돌리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황금 송아지는 주차장, 회의실, 거실 구석, 유명인과 라이프 스타일 잡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라는 키쓰 톤데(Keith Tondeur)의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고대 근동의 세상과 마찬가지로 신들의 세상이다. p 291-292 (제5장 환생한 신들의 세상)
우상숭배에 있어서 “믿음의 결핍”과 “다른 신앙”은 인과관계로 작용한다. 야훼께서 필요를 채울 수 없다고 불신할 때, 이방신들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우상숭배도 동일한 인과관계 속에서 발생했다. 예컨대 야훼 하나님께 공급의 능력이 없다고 불신했던 히브리 민족은 이방신들의 영토로 되돌아가려 했다. 야훼께 치료의 능력이 없다고 불신했던 아하시야는 에그론의 바알에게 치료를 받으려 했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 우상숭배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셈이다. 현대인의 맘몬 숭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맘몬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야훼의 초월성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데 있다. 물론 우리의 입술은 야훼의 초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야훼의 초월성을 고백하고 찬양한다. 주일날 교회의 회중 기도와 찬양에 자주 등장하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이를 명시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행동은 전혀 다른 고백을 할 때가 있다. 이런 괴리감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초월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심령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입술에까지만 닿은 가난한 믿음은 맘몬 숭배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p 302-303 (제5장 환생한 신들의 세상)
아론은 다소 황당한 답변을 제시한다. 황금 송아지가 불에서 저절로 나왔다는 게 아닌가? 현대인의 눈에 비친 아론의 변명은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 마치 신상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처럼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주석가들은 아론의 대답을 “궁색한 변명” 혹은 “어처구니없는 변명”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게 반응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아론의 답변이 신상을 만드는 문맥에 들어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고대 근동 사람들은 입 씻기-입 열기 의식을 통해 신상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의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부분은 신상 만들기 작업에 인간이 개입했다는 부분을 철저히 부인함으로써 신상의 신성을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지식은 아론이 출애굽기 본문에서 의례사제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독법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아론의 답변을 신상 만들기 의식의 한 요소-인위적인 흔적을 지우는 요소-로 볼 수 있게 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의례사제 아론이 내놓은 답변은 “궁색한 변명”이나 “어처구니없는 변명”이 아니라 입 씻기-입 열기 의식에 기대고 있는 ‘종교적인 답변’이다. p 73 (제1장 신들의 세상)
사무엘상 6장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신관이 가정되어 있다. ‘본국의 신들이 막을 수 없는 재앙-우연히 발생한 재앙-이 있을 수 있다’라는 개념이다. 사무엘상 본문의 이방 사제들과 점쟁이들은 블레셋 지방에 일어난 재앙을 해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두 개로 제시했다. 하나는 적국의 신-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일으켰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어쩌다가 당한 재앙”(삼상 6:9)이었을 가능성이다. 여기에 “그저 어쩌다가 당한”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미크레는 ‘우연’ 이나 ‘운명’을 의미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블레셋 이방인들은 적국의 신과 상관없이 미크레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재앙이 존재하고, 그 재앙은 본국의 신들도 막을 수 없다고 믿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독특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바로 우주에는 신들조차 온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영역-미크레에 의해 구동되는 초월적인 영역-이 있다는 개념이다. p 131-132 (제2장 이방인들의 세상)
우선 계명이 주어졌던 시점을 출애굽기 문맥 속에서 고려해 보자. 야훼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집트의 모든 신들보다 당신이 강하다는 점을 계시하심으로 이집트의 신들이 예배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신들을 버리고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야훼께서 정복하셨던 신들은 이집트의 신들이었지 다른 지역의 신들-광야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거주하는 신들-은 아니었다. 히브리 민족은 야훼께서 이집트 외부에 있는 신들보다 강한지 혹은 약한지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께서는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는 계명을 이집트 땅을 벗어난 모압 땅에서 주셨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이 제1계명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야훼께서 이집트에서 보여주신 능력이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다신론의 개념-특히 신이 특정 영토와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에 깊게 노출되어 있던 고대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다. p 153-154 (제3장 언약 백성의 세상)
야훼의 치료를 경험한 나아만은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행동-아람의 국가신인 림몬에게 허리를 굽히는 행동-에 대해서 몹시 불편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림몬은 “천둥을 치는 자”(Ramman)라는 뜻으로 풍우의 신 바알의 요란한 속성을 강조하는 호칭으로 보인다. 야훼 하나님의 치료를 경험한 나아만이 아람의 국가신 림몬(바알)에게 절하는 행위를 더 이상 옳지 않게 판단했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은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아만이 야훼를 단지 이스라엘의 치료의 신으로 이해했다면 굳이 아람의 국가신을 배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신론자였던 나아만은 림몬을 국가신으로, 야훼를 치료신으로 섬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야훼의 치료를 경험한 나아만은 야훼와 림몬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이해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p 200 (제3장 언약 백성의 세상)
우리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풍요의 신으로 섬기지는 않지만, 풍요를 가능케 하는 돈을 신처럼 섬기기도 한다. 우리는 세크메트, 닌티, 에쉬문을 치료의 신으로 섬기지는 않지만, 치료를 가능케 하는 의학을 신처럼 섬기기도 한다. 우리는 토트, 에아, 나부를 지식의 신으로 섬기지는 않지만, 지식을 가능케 하는 학문을 신처럼 섬기기도 한다. 이처럼 고대의 신들은 새로운 시대의 옷을 입고 다른 이름으로 환생했다. 전쟁의 신들은 군사력으로, 성의 신들은 외모지상주의로, 재물의 신들은 물질만능주의로 환생해 현대인들의 시선을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돌리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황금 송아지는 주차장, 회의실, 거실 구석, 유명인과 라이프 스타일 잡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라는 키쓰 톤데(Keith Tondeur)의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고대 근동의 세상과 마찬가지로 신들의 세상이다. p 291-292 (제5장 환생한 신들의 세상)
우상숭배에 있어서 “믿음의 결핍”과 “다른 신앙”은 인과관계로 작용한다. 야훼께서 필요를 채울 수 없다고 불신할 때, 이방신들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우상숭배도 동일한 인과관계 속에서 발생했다. 예컨대 야훼 하나님께 공급의 능력이 없다고 불신했던 히브리 민족은 이방신들의 영토로 되돌아가려 했다. 야훼께 치료의 능력이 없다고 불신했던 아하시야는 에그론의 바알에게 치료를 받으려 했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 우상숭배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셈이다. 현대인의 맘몬 숭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맘몬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야훼의 초월성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데 있다. 물론 우리의 입술은 야훼의 초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야훼의 초월성을 고백하고 찬양한다. 주일날 교회의 회중 기도와 찬양에 자주 등장하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이를 명시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행동은 전혀 다른 고백을 할 때가 있다. 이런 괴리감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초월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심령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입술에까지만 닿은 가난한 믿음은 맘몬 숭배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p 302-303 (제5장 환생한 신들의 세상)